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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정공>성균진사월천공휘시술묘표(成均進士月川公諱時述墓表)
成均進士月川公諱時述墓表 粤自丙子虜亂畸翁鄭公爲號召使玉果縣監李興浡等五公倡義發檄以應之有若進士趙公時述以畸翁門人見其檄文慷慨泣曰此正捐軀報國之日也遂與宗黨鄉隣募收兵粮督赴義陣會于礪山推畸翁爲領袖行至清州聞城下之盟北向痛哭而歸遂謝世歛迹專意讀書嘗吟一詩曰慷慨心中事空餘老此身春秋無地讀誰識大明人噫公平素志節有如是焉而早歲喪逝徽蹟湮沒惜哉公字學而淳昌人遠祖諱璋高麗檢校大將軍歷四世至典農副正諱瑜號虔谷不仕 我朝 世宗朝旌其忠孝特書以前朝職名寔公八世祖也曾祖諱大楠秉節校尉祖諱愿從仕郎考諱暻生員妣錦城羅氏學生德用女公生於 萬曆戊申文學夙著爲士友所推許癸酉登司馬自丙子後廢公車業年三十五而以 崇禎壬午卒葬于順天九吐里之負丙原配南陽洪氏佐郎宗海之女祔公墓左有三男長維馨次維四次維元生員四女長適鄭光演 贈參議次閔行源次安琥進士次黃信中内外孫曾以下不能盡錄嗚呼公之焯焯群行雖無文籍可徵而南鄉之所誦慕久而不己若使公不遭亂瘼而克享避齡則其所展志就業當如何哉今後孫將竪石表墓公之當日義擧儘可以諗夫永世矣謹書此俾鐫石陰 恩津 宋煥箕 撰 성균진사월천공휘시술묘표(成均進士月川公諱時述墓表) 병자호란 때 기옹(畸翁) 정홍명공이 호소사가 되자 옥과현감 이흥발(李興渤)등 다섯 분이 창의(倡義)하는 격문(檄文)을 내 응모하기를 꾀했는데 진사 조시술(趙時述) 공같은 분은 기옹의 문인으로 그 격문을 보고는 강개하여 「이때야말로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하고는 마침내 일가와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군량을 모아 의병의 진영으로 나가기를 독촉하였다. 여산(礪山)에서 모여 기옹을 영수(領袖)로 추대하고는 청주로 갔는데 거기서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는 북쪽을 향해 통곡한 다음 돌아왔다. 그때부터 세상 일을 사절하고 자취를 숨기고는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일찌기 이렇게 시로 읊었는데, 슬프고 분한 마음 품은 채, 慷慨心中事 공연히 몸만 늙었네. 空餘老此身 춘추를 읽는 데 없으니, 春秋無地讀 누가 대명 사람을 알리. 誰識大明人 하였으니, 아! 공의 평소 지절이 이러했었는데 일찌기 세상을 버려 사적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의 자는 학이(學而)로 순창인이며, 시조 휘 장은 고려 검교대장군이요, 四세를 지나 전농부정 휘 유는 호가 건곡인데 우리 조선에 벼슬하지 않아 세종 때 그의 충효를 정표하면서 특별히 고려 때 관직을 썼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八세조이다. 증조 휘 대남(大楠)은 병절교위요, 조 휘 원(愿)은 종사랑(從仕郎)이며, 아버지 휘 경(暻)은 생원이며, 어머니 금성나씨(錦城羅氏)는 학생 덕용(德用)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무신년(一六○五)에 출생하여 일찌기 문학이 드러나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받았고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三十五세 되던 숭정 임오년(一六四二)에 졸하여 순천 구토리(九吐里) 병좌(丙坐) 던덕에 장사하였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좌랑 종해의 따님인데 공의 묘 왼쪽에 부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유형(維馨), 차남은 유사(維四), 그 다음은 유원(維元)인데 생원이며, 딸은 넷으로 큰딸은 정광연(鄭光演)에게 출가했으니 참의에 추증되었고, 다음은 민행원(閔行源), 진사(進士) 안호(安琥), 황신중(黃信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손과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순실한 여러 행실은 비록 문적이 없어 고증할 수 없지만 남쪽 고을 사람들이 사모하여 기리기를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있다. 만약 공이 난리를 만나지 않고 오랜 수명을 누렸더라면 그 성취한 업적이 어떠했겠는가? 이제 그의 후손이 비석을 세우면서 공의 당일 의거하던 일을 영원토록 전하고자 하기에 삼가 이렇게 써서 비 뒷면에 새기도록 한다. 은진(恩津) 송환기(宋煥箕) 지음 註:병자호란(丙子胡亂)—이조 인조(仁祖) 十四년 병자년(一六三七), 청(清)이 군신(君臣)의 조약을 청함에 척화신(斥和臣)이 반대하자 청태종이 직접 二十만 대군으로 침략, 조정은 남한산성에 피난했다가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 왕자는 볼모로 심양(審陽)에 갔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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